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덴무 덴노 (문단 편집) === 진신(임신)의 난 === 壬申の乱 (じんしんのらん) 《일본서기》에 따르면, 덴지 덴노는 병이 깊어진 10년([[671년]]) 10월 17일에 동생 오오아마를 병상에 불러 >"'''내 병이 심하니 뒷일은 너에게 맡기겠다.'''" 는 말을 했다고 한다. 미리 측근인 소가노 야스마로(蘇我安麻呂, ? ~ ?)로부터 경고를 받은 오오아마는 >"'''황후(야마토히메노 황후)에게 즉위하게 하시고, 오오토모에게 여러 정사를 행하게 하소서. 신은 천황을 받들어 출가수도하고자 합니다.'''" 라며 사양했다. 그리고 그날 오오아마는 삭발하고 요시노(吉野, 지금의 일본 나라현)로 낙향했다. 요시노에서 그는 우노노사가라노 히메미코와 [[구사카베 황자]] 등의 가족, 소수의 사인과 궁녀를 거느리고 은둔 생활을 했다고 한다. 한편 오미의 오오쓰노미야(大津宮, 오늘날의 일본 오쓰 시)에서는 덴지 덴노의 뒤를 이어 오오토모가 조정의 일을 맡아 후계자가 되었다[* 다만 즉위했는지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이듬해인 672년 6월 22일, 오오아마는 요시노에서 거병을 결의하고, 무라쿠니노 오요리(村國男依,? ~ 676) 등을 미노에 사자로 파견했다. 그리고 2일 뒤 그 자신은 몇 명의 측근만을 거느린 채 뒤를 따랐다. 오오아마는 후와(不破)의 길을 봉쇄해 오미 조정과 도고쿠(東國, 동국) 사이의 연락을 차단한 뒤, 군사를 일으키는 사자를 히가시야마(東山, 시나노 등지)와 도카이의 오와리 등지에 보냈다. 그리고 야마토 분지에서 오오토모노 후케이(大伴吹負)가 거병하여 아스카의 야마토쿄(倭京)을 급습하고 점령했다. 이윽고 도고쿠에서 수만 명의 대군이 후와에 집결, 오미와 야마토 두 길로 진군했다. 오미 방면으로 진군한 군세가 비와 호 동쪽을 돌아 세키가하라를 비롯한 각지에서 오미 조정측의 군사들을 수차례 격파한 끝에, 7월 23일 오오토모는 자결하고 진신의 난은 막을 내렸다. 진신의 난에서 주로 활약한 씨족은 야마토 분지 소가의 [[소가]]씨와 [[오와리]](尾張)의 호족인 오와리(尾張)씨였다[* 오와리의 호족 오와리노 무라지 구사카(尾張連草香, ? ~ ?)의 딸이자 [[케이타이 덴노]]의 부인이었던 오와리노 메노코히메(尾張目子媛, ? ~ ?)의 아들들인 [[안칸 덴노]]와 [[센카 덴노]]를 배출한 씨족이다. 오와리는 당시 [[에조|에미시]]의 땅이었던 관동과 대치하는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대왕(오오키미)을 둘이나 배출한 것으로 보이지만, 구 황실인 [[타시라카 황녀]]의 아들인 [[긴메이 덴노]]에게 밀려났다.]. 소가씨와 오와리씨는 친밀한 사이였고, 소가 파벌이 오오아마 황자를 후원해줬다는 것이 특징이다. [[을사의 변|잇시의 변]]에서 [[소가노 에미시]]와 [[소가노 이루카]]가 죽으면서 소가씨의 가세가 기울었지만, [[백강 전투]]의 대패로 [[덴지 덴노]]는 [[야마토]]로 못 돌아가고, [[오미]](近江)에 본거지를 마련했다. 아마도 백강 전투의 대패로 야마토 내에서 [[소가]]씨의 힘이 다시 강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에 덴지 덴노가 즉위한 뒤 잇시의 변에서도, 백강 전투에서도 도와주지 않은 오오아마 황자를 황태자로 삼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가 일족은 오와리 호족과 손잡고 오오아마 황자를 후원해 덴지 정권의 타도를 원했다. [[덴지 덴노]]는 은근히 역사에서 붕 뜬 존재인 데다가,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의 죽음을 두고 [[소가노 이루카]]의 저주라고 다들 꼴 좋다고 여긴 걸 보면 야마토 사람들은 [[중앙집권제]]를 적극 지지한 개혁파인 소가씨의 편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진신의 난은 일본 고대사 최대의 쟁란이자 미스터리한 대사건이다.''' 거의 벌거숭이 상태로 동국으로 도망간 오오아마 황자가 조정의 정규군을 보유한 선황 덴지 덴노의 아들 오오토모 황자를 이긴다는 건 비정상이다. 게다가 덴지 덴노는 오오아마 황자를 모반죄로 몰아붙이기 위해 양위하겠다는 말까지 했으나 이를 오오아마 황자가 거절해 오오토모 황자에게 계승권이 넘어간 상태였다. 누가 봐도 상식적으로는 오오토모 황자가 이겨야 했다. 하지만 《일본서기》에는 오오아마 황자가 동국으로 도망쳤다는 정보가 오미 조정에 전해진 순간, 조정의 많은 병사들이 무기를 버리고 도주했다고 기록한다. 우선 소가씨의 활약을 보자. 덴지 덴노가 병상에서 오오아마 황자를 부르자 주의하라고 진언한 건 [[소가]]씨였고, 이를 받아들여 오오아마 황자는 덴지 덴노의 함정을 피했다. 다음으로 오미 조정의 주력군이 동쪽으로 진군해 오오아마군의 주력부대와 격돌하는데, 오미군의 대장을 부장인 소가씨가 살해했다. 이때문에 오미군은 변변한 싸움 한번 못 해보고 공중분해되었다. 그리고 오오아마의 군대는 곧바로 오미 조정으로 진격해 들어올 수 있었다. '''즉, 진신의 난의 최대 공로자는 소가씨라고 볼 수 있다'''. 소가씨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도와준 이유는 오오아마 황자의 정체가 덴지 덴노의 이부형 아야 황자이고, 그의 아버지인 다카무쿠 왕(高向王)이 소가씨라서 그렇다는 추측이 있다. 동국의 유력한 호족으로 한때 [[안칸 덴노]]와 [[센카 덴노]]를 배출한 오와리의 대호족 오와리씨는 진신의 난이 일어난 직후, 요시노에서 자신에게로 도망친 오오아마 황자 일행을 받아들여 행궁을 짓고 군자금을 모았다. 오오아마 황자가 동국에 들어간 것만으로도 오미 조정이 대혼란에 빠졌다는 점에서 오와리씨가 큰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일본서기》는 오와리씨의 활약을 그냥 빼 버렸다. 《속일본기》에 오와리씨가 진신의 난의 공적을 칭찬받아 자손에게 포상이 있었다는 기사를 통해 활약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는 오와리씨의 동족인 오오아마(大海人)씨가 덴무의 양육을 맡았다고 기록했다. 이로써 덴무 덴노와 동국의 대호족 오와리씨가 서로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